뜬금없이 찾아온 나의 정체성 혼돈기

이민 온 누구나가 그렇듯이, 이왕 이민 온 것 잘 살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였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아이들은 이민생활에 잘 적응해서 학교마치고 직장생활하는 것에 감사하며 살았던 나에게 느닷없이 “나는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것에만 감사했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면서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열심으로 산 25여년의 시간들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나름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에 의구심이 들며 처음 뉴질랜드에 와서 느꼈던 ‘낯설음’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에 뉴질랜드에 와서인지, 별 불편함이 없는 뉴질랜드에서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하다.  그런 아이들이 사는 곳이 내가 살 곳이라고 믿고 있었고, 나도 만만치 않은 세월을 이 곳에서 산 내공이 있어서 이제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느닷없이 내 노후는 한국 사람들과 한국 말을 하며,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욕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있으면 받을 수 있는 연금을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에 돌아가서 살수 있는 입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그리고 25년 동안 한번도 보지못한 한국의 가을이, 울긋불긋한 단풍, 노란 은행잎이, 그리고 코스모스가 너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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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오면 단풍 구경을 실컷 시켜줄테니 다녀가라는 언니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큰 딸을 보고 오는 길에 한국에 들렸다. 언니와 아름다운 단풍으로 뒤덮인 오대산, 설악산을 “정말 아름답다, 멋있어, 바로 이런게 정말 가을 단풍이지”를 되뇌이며, 아름다움에 취하여 힘든 줄도 모르고 산을 오르내리며 며칠을 원도 없이 단풍구경을 하며, 언니와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였더니 답답한 가슴이 풀린듯 하였다. 

이민자들의 대부분이 겪는 일이겠지만, 가족, 친지를 뒤로하고 낯선 나라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은 사회에서 소외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메꿀수 없는 문화 혹은 정서의 차이, 자주 볼수 없는 가족들, 혹은 한국사람으로써 익숙한 것들로 부터의 단절감을 경험할 때는 더욱 외로워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에 익숙해 지고 부모 세대의 어려움을 이해는 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외롭게 하는지는 잘 모르리라. 

아마도,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단풍이 그리웠기도 했지만,  “그래, 그때 그랬어”라며 추억을 공유한 가족, 친지들과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한국 정서를 가진 누군가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대화가 그리웠고, 몸에 익숙하여 잊어버릴 수 없는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리웠나 보다.  언니와 잊고 지냈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좋은 추억도 되찾고, 얼굴 붉히는 민망했던 기억에 큰 소리로 웃기도 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찾은 듯했다.  추억을 뒤로하고 바쁘게만 살았던 나에게 잠시나마 좋은 기억을 찾을 수 있는 휴식을 갖게 해 준 언니에게 많이 고맙다.  


새움터 회원; 유 윤심 (정신과 간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