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엔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 때까지 앉아 있는다. 그리고 또 점심을 먹은 후 앉아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지난해 5월초 104세의 ‘안락사’로 더 잘 알려진 ‘조력자살’을 통해 영면한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박사가 죽기 전 외신과의 인터뷰 중 나눈 이야기입니다. 저명한 생태학자인 구달박사는 오랜 시간동안 안락사를 준비 해 왔다고 합니다. 구달박사는 84세였던 지난 1998년 운전면허가 취소된 이후 ‘혼자 움직일 수 없다면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올해 초에도 수차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했으나 실패한 후 안락사 옹호 기관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기 전 구달 박사는 취재진에게 “드디어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고도 밝혔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마지막 부분인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104세 생을 마감했습니다.
많은 세계 선진국들이 21세기 들어 급격히 고령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출생한 베이비 부머라 일컬어지는 세대가 노년인구로 진입하게 되면서 고령화 사회로의 가속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반적 은퇴 나이인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총 인구의 25%이상인 경우 초고령화 사회라 칭합니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 하였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고령인구는 전체 뉴질랜드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2030년대 초 20%를 돌파하고 2068년쯤이면 최대 33%에 육박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뉴질랜드 전국에 510개의 노령자 보호 시설 (35,000실) 에는 75세 이상 노인 약 30,000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안락사를 선택한 구달 박사를 어떻게 바라 볼까요?
뉴질랜드에서도 안락사 입법화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치열합니다. 의학 발달로 인한 인위적인 수명연장은 과연 진정한 생명 영위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죽음이라는 영역이 신의 소관인지 인간의 개인적 권리인지와 같은 종교 철학적 논쟁을 야기 시키게까지 합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해 가는 모든 사회가 처음으로 마딱드린 죽음과 인간 존엄사이의 고민입니다.
역사에는 진시황제와 같이 무병장수를 꿈꾸었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이고 이는 삶의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청춘을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 반가울리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건강은 나빠지니 몸은 삐걱 거리고 마음은 굴뚝 같아도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내게 즐거움을 주던 많은 것들, 가령 운동, 여행, 취미 활동, 사회 활동이 점점 불가능해 집니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만나는 횟수로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주변에 자꾸 신세를 지게 됩니다.
반대로 이곳 저곳 아픈 곳은 늘어나고 이에 비례하여 복용하게 되는 약도 증가합니다. 우울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고 외로움과 서러움만 커져갑니다. 이처럼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니 삶에 대한 의욕마저 떨어 뜨리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인생이란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바다로 나서는 배의 제일 밑 부분에는 물을 저장하는 공간이 있으며 이곳에 담겨져 있는 일정량의 물을 평형수라고 합니다. 평형수는 배의 좌우 균형을 잡아주어 거친 바다에서도 배가 순항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나 화물을 더 태우기 위해 평형수를 덜어내면 배는 균형을 잃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여정이 언제까지 일지 알수 없지만 노년의 균형잡힌 삶을 생각하며 이제 평형수를 잘 채우고 짐은 덜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새움터 회원 – 장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