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움터 회원 정인화의 민낯 보이기 – 5
2017년 10월 4일
글: 정인화(새움터 회원)
나이 차이 때문일까. 형과 누나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많지 않다. 어릴 적 같이한 추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기껏해야 큰 누나가 두세 번 데리고 간 어린이 회관이 전부다.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 교류를 자주 하지 않았다. 가끔가다 미안해질 때는 뉴질랜드에 산다는이유를 들어 나의 게으름을 변명한다. 이따금 전화로 통화하지만 조금은 서먹하다. 공통 분모가없어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중간에서 만날까.”
시내버스 운전 일을 하는 형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올해 정년을 맞는, 내가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형이다. 인천에 사는 형은 한 번도 해외여행을 못 했다. 그런 형을 위해 은퇴 기념으로 누나들과 함께 태국 여행을 제안했다. 태국에서 필요한 경비는 내가 다 내겠다고 호탕하게 소리쳤다. 다들 좋아헀다. 괜히 우쭐해졌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조금은 두려워졌다. 어릴 때부터 가족 모임은 늘 끝이 안 좋았다. 즐거은 마음으로 나섰다가 싸우고 돌아온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딱 한 번만이라도 과거의 유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의지가 솟았다.
‘와우! 미치겠다.’
방콕 도착 뒤 이틀이 지나 허니문 기간은 끝났다. 형의 끝없는 요구와 큰 누나의 계속되는 불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뒷머리에서 올라오는 열은 아무리 식히려 해도 내려가지가 않았다. 여태까지 배웠던 호흡을 통한 자기 진정,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치료양식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심리치료사로서의 내공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에 내 자신이 싫었다. ‘Never again.'(다시는 안 할거야.)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하면서 다시는 다시는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영어 한 문장을 못 만드는 형과 누나들을 위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견디어 보자고 다짐했다. 사흘이나 남았지만 결코 등은 돌리고 싶지 않았다.
거리에서 걸을 때와 다르게 식당과 카페에서는 모두 말이 없었다. 한공간에 거리를 두고 조용히 앉아있는 게 어색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메뉴판을 뒤적이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과 함께 불편과 긴장에 익숙해졌다. 분노와 후회가 가라앉자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형과 누나들이 어떻게 있나 슬금슬금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입은 육칠십 대 노인들의 축 처진 어깨와 웃음기 없는 얼굴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귀가 잘 안 들렸다는 형, 어릴 때 방 안에 묶여 있었다는 큰 누나, 형제자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찿
았다는 셋째 누나의 과거가 생각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귀가 어두워서 생기는 오해와 그 때문에 파생되는 수모를 견디며 드디어 정년을 맞은 형의 자부심 뒤에 숨은 상처를 못 봤다. 다 큰 동생을 무시하면서 특별한 사람인 양 상의 없이 과도한 요구를 하는 형이 답답하여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나 의심하고 무시하였다. 부모님이 먹고살기 위해 자신을 방안에 묶어놓고 일하러 갔다는 얘기를 큰누나는 여러 번 했다. 그게 어떤 경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하고 그냥 지나치며 들었다.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 있지 못하고 “싫어, 갈래.”만 연발하는 큰누나를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증후군 (ADHD)가 있나하고 생각하며 “좀 즐깁시다.”라고 짜증만 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눈치만 살피는 또 다른 누나에게는 “구원자(rescuer)나 피해자(victim)처럼 굴지 말고 본인의 목소리 좀 찿아.”라고 핀잔을 주었다. 모든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뒤돌아보니,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몰랐던 형제들의 다른 경향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이는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공감하는 능력을 떨어뜨렸다. 당연히 이 들의 아픔과 두려움을 연민으로 품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남이가.” 여행이 끝나는 이틀 전, 나는 치앙 마이에서 “우리 정기적으로 만날까.”라고 물었다. “우린 형제잖아. 남이 아니지.”라고 덧붙였다. 모두의 얼굴에서 옅은 웃음이 스쳤다.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의 산악 접경 지역)에 갈 때였다. 미니 버스 안에서 잔기침하는 큰누나와 형에 대해 작은 소리지만 신경질적으로 불평하는 한 영국인 관광객하고 말싸움을 했다. 형제들이 뒤에 있다는 ‘빽'(?)을 믿고 겁도 없이 한마디 던졌다. “Thailand is a Buddhist country. Be
kind and generous.” 어쩌면 나한테 지르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친절하고 관대해져 봐.’ 방콕 공항에서 형제들과 작별할 때 우리 모두 분명히 웃었다. 우리 집에 내려왔던 떠날 때 등 돌리는 전통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희망을 봤다. “잘가. 내년에 또 만날 거지.” 가슴이 여렸다. ‘형제니까’를 연발하며 무언가를 이루거나 잡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 고통스럽게 얻은 작은 희망이 내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