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4일
글: 정인화(사회복지사)
♥ 정인화의 민낯 보이기
우리 집 데크(deck)에서 바라보는 서쪽 하늘은 장관이다. 내가 아는 모든 수식어를 송두리째 훔쳐간다. 난 그 정경에 한없이 왜소해진다. 움츠러드는 내 모습이 딱히 싫지만은 않다.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 내 시선은 항상 오렌지 색깔에 머문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난 형상보다는 색깔이 좋다. 붉게 변해가는 색깔을 보고 있으면 캄보디아 씨엠립 (Siem Reap) 프놈바켕 (Phneom Bakheng)에서 바라본 노을이 떠오른다.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앙코르와트를 찾는 그 나라 말이다.
그런 캄보디아는 나에게 몇십 년 전의 한국 역사의 상흔을 되살려 낸다. 한국전쟁뒤, 이별 상처 그리고 기아에 허덕이던 그 모습을 캄보디아에서 본다. 폴포트 정권 아래서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느낀다. 특히 그들의 엷은 미소 속에서도 말이다. 프놈바켕에서 보는 넓게 펼쳐진 오렌지 색의 노을은 그들의 아픔을 감싼다. 그 사람들도 내 아버지만큼 살려고 발 버둥거렸을까, 가끔 상상해 본다. 아버지… 아프다.
믿었던 아들놈이 뉴질랜드로 떠났다. 절망하셨을까. 모른다. 아버지는 몇 해 뒤 자식은 많지만 한국을 뒤로하고 아들 놈을 찾아왔다. 의지할곳없는 낯선 곳에서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조그만 땅에 부으셨다. 잔디밭이 고추밭으로 배추밭으로 변할때 자그마한 웃음, 살아있음을 봤다.
“그만 좀 넓히세요.”
짜증스런 내 목소리가 들린다. 부끄럽다.
아버지는 빠른 속도로 산화되어갔다. 당당했던 체구는 커져가는 암덩어리와 하루가 다르게 작아졌다.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힘이 없었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저녁 노을처럼 사라져갔다. 나에게 당신 존재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경상남도 조그만 시골마을. 뚝하면 때리는 아버지와 나이 차이 별로 없는 새 엄마 아래서 아들은 집에서 도망을 쳤다. 그 때 나이, 열두살이라 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온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캄보디아 아이들처럼 구걸을 했을까. 난 당신이 어떻게 생존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삶은 실체 없이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알고 싶은 욕구가 아프게 밀려온다. 자주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날 힘들게 한다.
저녁 노을을 바라볼때,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렌지 색 작업조끼를 입고 서 있다. 눈에 아른거린다.
덴마크계 독일인으로 나치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발달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슨(Erikson)이 생각난다. 에릭슨은 심리 발달이론에서 통합성 또는 절망감을 인생 마지막에 경험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본 식민시대, 한국 전쟁 그리고 인생 말년의 뉴질랜드 생활을 어떻게 보냈을까. 당신이 살아오면서 체득한 지혜를 고향 멀리서 누구랑 함께했을까? 커가는 손자 손녀들이 영어로 떠들기 시작했을때, 아버지는 뒤에서 웃고 계셨다.
암이 진행되어도 아버지는 손을 쉬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는 집에서 어디론가 나갔다. 두려움이 다가왔다. 몇 시간 후, 까만 비닐 봉지를 내 놓았다. 봉지 속에는 노을 색의 감이 담겨있었다. 몇 개는 물러 터졌다. 아본데일 일요시장 (Avondale Sunday Market)에 아픈 몸을 이끌고 다녀오셨던 것이다. 걸어서 그 멀리까지, 얼마나 힘 드셨을까.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썩어빠지고 문드러진 감을 왜 사와?”
아버지의 얼굴에 배인 고통이 내 가슴 속에 송곳처럼 꼿쳤다. 그냥,“고마워요”했으면 좋으련만. 감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내 삶은 바쁘다. 우선 먹고 살기 바쁘다. 먹기위해 일하는 내 모습은 가끔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다. 조금 더 알았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날에는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쯤 아버지 얼굴이 나타난다. 그립다. 조금씩 고이는 눈물은 다 큰 자식 얼굴과 함께 어버지 얼굴을 흐트려 놓는다. 무엇을 기억하고 남겨야 하나. 커다란 숙제다. 노을이 지고 있다.
새움터 회원 정 인화는 1991년에 뉴질랜드에 이민와 스무 해 가까이 상담과 심리 치료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