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8일
글 : 배 태현
직업상 이런 저런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젠 제법 연륜이 생겨 처음 보는 사람과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겉모습과 상관이 없이 내면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자원이 빈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외모는 화려하지 않지만 내면에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는 화려해도 내면에 다른 사람들과 나눌 자원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을 채우는 풍성한 자원들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들을 이겨낸 후에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 속에서도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상처들을 아파하며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난과 고뇌와 상처의 흔적들이 아물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이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이해 받고 있다는 느낌, 공감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내면적으로 자원이 풍성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치유되지 않거나 아물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배척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왠지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 거부를 당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내면적으로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고난과 고뇌와 상처가 어느 날 갑자기 내면적인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 난 자신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고통과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는 내면적 자원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조금 깨어져 금이 가고 오래된 못생긴 물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의 주인은 그것을 물을 길어오는데 계속 사용했습니다. 깨어진 물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미안하다고 느낀 깨어진 물항아리가 주인께 왜 새 항아리를 구하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물항아리를 지고 계속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을 지나면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그제야 물항아리는 그들이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길을 보았습니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듯 싱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이 산골 길가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 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빈약한 내면적 자원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풍부한 내적 자원으로 사람들을 품는 성숙한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