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31일
배태현
지난 2010년 11월 19일 오후, 뉴질랜드 남섬 그레이마우스(Greymouth) 북동쪽 46km 지점에 위치한 파이크 리버(Pike River) 광산에서 폭발이 발생해 광부 29명이 매몰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산 내부에서 발생한 유독가스로 구조작업이 지연되던 중 24일 오후에 또 다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혹시나 매몰된 광부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도 또 한 번의 폭발과 함께 날아갔습니다. 당시 희생된 29명의 광부 중에는 조지프 던바라는 17세의 소년도 있었습니다. 조지프는 일찍부터 광부의 꿈을 꾸며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다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 광산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 설레며 첫 출근을 했던 날,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매몰되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그가 그토록 꿈꾸던 그 곳에 그의 꿈과 함께 묻혔습니다.
한편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뉴질랜드령인 남태평양에서 실종된 10대 소년 3명이 실종된 지 61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구조된 소년들은 9월 말 작은 알루미늄 보트를 타고 이웃 섬을 향해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갔다가 실종됐다고 합니다. 이들은 배에 실려 있던 코코넛과 배에 내려앉은 갈매기를 잡아먹었으며, 빗물과 바닷물로 연명했지만 다행히도 건강상태는 나쁘지 않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종 후 가족들은 매일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세 소년의 구조소식을 듣고 그들이 살던 섬 주민 5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소년들의 구조를 기뻐하고 축하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전혀 다른 결과의 사건들을 보면서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한쪽에선 누군가를 잃고 상실의 슬픔을 눈물로 달랠 때, 동시에 다른 한 쪽에선 누군가를 다시 얻은 상봉의 기쁨을 웃음으로 지어냈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슬픔과 기쁨이라는 것…. 사전적으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는 같은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퍼할 수 있는 것은 잃기 전에 그만큼 기뻐했다는 것이고, 기뻐했다는 것은 얻기 전 그만큼 슬퍼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슬픔과 기쁨의 경계선은 결코 그리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슬픔과 기쁨의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슬퍼도 웃음이 날 때가 있고, 기뻐도 눈물이 날 때가 있으니까요?
뉴질랜드에 이민을 와서 살아가는 분들 중에도 슬픔과 기쁨의 애매한 경계선에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정작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천혜의 훌륭한 자연환경 속에 살아가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개발이 늦은 불편함을 감소해야 합니다. 소박한 삶은 존경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그 속에서 우린 슬픔과 기쁨의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싫어지고 이민을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을 정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의 몫이 아닐까요?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개발되지 않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지루함을 안정감으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슬퍼할 일을 기뻐할 일로 바꾸어 버리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경계선은 자기 자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어떤 일이든 슬픔과 기쁨의 경계가 애매하다면 그것을 기쁨이라고 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