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문한 웰링턴의 여름은 오클랜드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올해 유난히 덥고 건조한 2월의 파란 하늘, 한 여름의 뙤약볕, 맑은 공기와 그 속에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가로이 바닷가 이곳 저곳에 자리 잡고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 낯설지만 그래도 마치 이미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일원 같은 편안한 하루를 보낸 뒤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항공편을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짧은 출장의 여운이 아쉬워 달리는 택시 안에서도 창문을 내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익숙한 올드팝송을 나즈막히 흥얼거렸다. 흥에 겨운 손가락들이 허공과 무릎위를 반복적으로 오갔다.
공항 청사로 들어서 거대한 독수리 조형물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뒤 간단히 요기를 할 음식점들을 기웃거렸으나 마땅한 저녁 요기거리를 찾지 못한 채 고민에 빠졌다. 오후 4시. 시간이 좀 이른 항공편이니 차라리 오클랜드에 가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 빈의자를 찾아 다른 승객들 틈에 끼어 앉았다. 스마트 폰 항공기 앱에서 탑승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 교통체증을 우려해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더니 아직도 탑승시간까지 2시간이 더 남아 있다. 어차피 저녁식사도 하지 않을 것이니 맘 편히 항공편을 기다리기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수하물 검사대를 통과 후 탑승구 앞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탑승구 바로 앞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엊그제 부터 읽기 시작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을 펼쳤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버린 1000명의 다양한 인생 선배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알려주는 삶의 지혜를 소주제별로 잘 정리해 놓은 책이다. 책갈피를 챙기지 못 해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지난 번에 읽었던 마지막 페이지를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았다. 고개를 끄떡이며 공감하는 내용들을 두 세번 반복해서 읽고 있는데 드디어 창밖으로 내가 타고 갈 항공기가 보였다. 시계를 보니 이제 30분만 있으면 탑승이다. 6시가 넘어가니 슬슬 허기도 느껴져 주위를 돌아보니 음료와 과자 자판기뿐이라 이내 포기하고 책으로 관심을 다시 돌렸다.
책장을 넘기니 다음 장의 소제목은 ‘지구만한 행복도 순간 속에 담겨있다’. 행복의 철학적 의미를 단순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제목이란 생각과 동시에 뻔한 내용일 듯 한 추측이 들었다. 막 첫머리를 읽기 시작하려는데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기내 서비스 준비 문제로 비행기가 30분 가량 출발 지연이 될 예정을 양해해 달란다. 잠시 뒤 주위에 다른 승객들 손에 들린 스마튼 폰에서 알람 소리가 하나 둘씩 울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스마트 폰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소대로 조급한 마음에 너무 일찍 서둘러 공항에 왔던 것을 살짝 후회 스러웠지만 현실을 받아 들기로 했다. ‘까짓거 30분인데 뭐… 더 이상의 출발 지연만 없으면 되지’.
예고한 30분이 다 지나가는데 탑승 안내를 하지 않았다. 잠시 뒤 또 다시 안내 방송. 대단히 안타깝게도 30분 정도 더 지연될 것이라고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여기 저기서 승객들의 짜증섞인 탄성이 나왔다. 허기가 먼저인지 지루함이 먼저인지 아무튼 나 또한 그 탄성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는 잠시 뒤 세번째 안내 방송의 예고편에 불과 했다. 또 한 번의 지루한 30분이 다 지나갈 때 즈음 안내 방송이 다시 나왔다. 예정된 항공기의 정비 문제로 인하여 모든 승객을 분산하여 수송할 예정이고 새로이 탑승권을 수동으로 발급한단다. 같은 내용의 안내 문자를 받은 승객들은 하나 둘씩 서둘러 안내에 따라 탑승권을 받는다. 결과는 앞으로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8시. 예정대로라면 나는 이 시간에 당연히 오클랜드에 있어야 했다. 그것도 저녁 식사 후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두번의 출발 지연 보다 짜증 스럽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사이 읽어 내려간 책 내용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음미하는 능력,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은 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 첫걸음은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 날 청명한 오클랜드의 밤공기가 참 좋았다.
새움터 회원 장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