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

매달 말이 다가오면 걱정이 인다. 여러 가지 약속을 해 놓고도 제대로 못 지켜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이다. 차일피일 미루다 마감일이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늘어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다. 능력도 없으면서 OK를 남발하는 자신에 짜증을 부리지만, 이미 약속한 것을 어찌할까.

 

“좋은 소재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시간에 쫓겨 글 벗들에게 SOS를 보낸다. 이렇게 절박해질 때는 창피하지가 않다. 무조건 순간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뒤를 안잰다. SOS를 친 뒤 누군가가 도와주리라는 희망에 안심이 된다.

 

“힘들어도 마감을 지켜야 그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완벽한 글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글쓰기 모임을 이끄는 ㄱ 선생이 카톡으로 보낸 말을 읽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큰 주먹으로 한 방 제대로 맞은 것처럼 숨도 탁 막힌다. 도와 달라고 했는데 설교를 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치사하다. 이 비참한 기분을 되돌려 주고 싶다. 어떻게 한다지.

 

문자를 막 치기 시작한다.

“내 뜻은 그게 아닙니다. 잘못 이해하셨네요.”

ㄱ 선생에게 받은 카톡의 부당함을 강조했다. 보낼까 하다 다시 한번 ㄱ 선생의 문자를 읽어본다. 찬찬히 뜯어보니까 별말도 없다. 괜히 고민했나 싶어 피식 웃는다.

 

내 감정에 충실하게 살지만, 행동으로는 쉽게 옮기지 말자고 늘 다짐해왔다. 그 생각이 들어 충동적으로 쓴 문자를 안 보냈다. 나름 내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순간 느꼈던 여러 감정의 원인이 궁금해졌다. 이유를 알면 감정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힘 있는 사람들한테 받은 상처가 많다.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 학교 선생님들, 경찰들, 학교와 회사의 선배들. 그들로부터 이해와 보호를 받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프다고 큰소리도 못 냈다. 더 나쁜 곤욕을 안 치르기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정의와 공평성이 되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ㄱ 선생의 글을 다시 여러 번 읽었다. 행간에서 격려의 뜻을 찾았다. 왜 진작 못 보았지. 심리치료에서 얘기하는 전이(transference) 때문일까. 내가 과거에 힘 있는 사람들한테 받았던 감정을 ㄱ 선생을 통해서 느꼈나. 여물지 않은 과거의 상처들을 보호하느라 현실을 보지 못 했을까. 자기방어에 급급해 도와주려고 내미는 손을 밀어버렸나.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의도와 경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 스스로 오랫동안 되새김질했던 말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답이 아니면 실망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절박했는데, 뜻하지 않은 훈계라니. 상대방의 뜻에 상관없이 굴욕을 느꼈다. 그래도 자기방어를 위해 변명의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화난 상태에서 문자를 보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생각만 해도 몸이 쪼그라든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깐이나마 화난 모습에 부끄럼움을 느끼며 감사의 문자를 전송한다. 흥분이 가라앉자 다른 생각이 몰려온다. 지금 벌이고 있는 나와의 싸움은 뭘까.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종종 불의를 보고도 겁이 나서 말도 못 했다. 아픔의 원인이 되어도 모른 체했다. 두려워서 피하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밀어내지 말고, 연민을 가지고 다가서는 게 나 자신과 해야 할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또 변할지라도 말이다.

 

달력을 보니 3월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마감일이 며칠 안 남았다. 굴욕을 안 당하려면 빨리 글쓰기를 마쳐야 한다.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새움터 회원: 정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