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고민
2017년 10월 20일
글: 김희연(새움터 회원)
“전화 끊어. 나 바빠!”
첫 마디가 날카롭다. 평소에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친구의 반응이다. 얼른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영 편안하지가 않다. 나도 바쁜 데 시간을 내서 전화했던 거였다. 특별히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동창도 없고, 친척도 없는 이민 생활에서 그래도 나를 많이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도 섭섭한 마음이 멈추질 않아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왔다. 기분은 살짝 나아진 것 같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결국, 엉뚱한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그 동안 너무 잘해줬나? 내가 너무 쉽게 보이나? 앞으로 내가 다시는 연락하나 봐라.’ ‘고슴도치의 고민’(Hedgehog’s dilemma).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정신 분석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신경과 의사 프로이트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사용한 말이다. 친밀감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상처와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는 체온을 지키려고 끼리끼리 모인다. 그러나 가시가 찌르기 때문에 떨어져 있어야 한다. 얼마 안 있어 고슴도치들은 다시 모인다. 그것도 잠시, 또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런 행동을 몇 번 반복한 후에 고슴도치들은 어느 정도 적절한 거리에서 머무른다. 이런 현상이 사람 관계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각자의 타고난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서로를 밀어낸다. 서로를 향한 뚜렷한 선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개개인의 타고난 기질과 각자 다르게 살아온 생활환경으로 말미암아 상처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좁은 이민 사회 안에서 우리는 쉽게 상처를 받는다. “우리가 남이야”하면서 상대에게 불쑥 다가간다.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다 퍼준다.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대편의 가시가 나를 찌르면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렇게 할 수가 있어”하고 원망을 한다. 또한, 반대로 “한국 사람이 다~아 그렇지 뭐. 내가 이래서 이민을 왔다니까…”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조금은 비아냥거리면서 다른 한국 사람들을 멀리서 쳐다본다. 본인은 한국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백인 키위만 보면 “땡큐!!”를 연발하며 환하게 웃는다. 이제 나를 들여다본다. 나도 혹시 이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2주 전쯤이다. 한국에 사는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치과 약속 시간에 늦어 정신없이 나가려던 참이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남편은 이미 차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나 지금 나가야 해!!!!!” 왜 전화했냐고 묻지도 못했다. 외치듯 내 말만 하고 성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때는 ‘치과에 갔다 와서 바로 전화해야지’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완전히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맙소사 !!!”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급하게 전화를 끊어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가 가도록 찬찬히 설명하고 싶다. 동생이 평소의 그 활달한 성격대로 “무슨 말 하는 거야! 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말해줬으면 참 고맙겠다.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친구에게도 내가 먼저 전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냐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냐고? 며칠 전에는 전화를 그렇게 받아서 내가 마음이 상할 뻔했다고.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이 친구와 나 사이의 적정거리를 머라 속으로 그려본다.